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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GIL ESSAY / 01

미래는 이미 존재하는가

미래는 만들어지는 것인지, 우리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인지 묻습니다.

  • 시간
  • 블록 우주
  • 결정론
  • 예언

들어가며

앞선 글 「예언은 어디서 오는가」에서는 이상한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들을 따라갔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말리는 다이모니온을 들었다고 했고, 잔 다르크는 성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극한의 상황에 놓인 탐험가와 조종사들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앤서니 피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안의 또 다른 자아인 ‘다이몬’이 이미 살아본 인생의 정보를 현재의 나에게 보내는 것일지 모른다고 상상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남는다.

미래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정보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내일 일어날 사건이 아직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미리 본다는 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반대로 미래가 어떤 형태로든 이미 존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언의 문제는 초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가 된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간

과거 ─────→ 현재 ─────→ 미래
사라짐         존재          아직 없음

우리는 보통 시간을 강물처럼 생각한다. 과거는 흘러가 버렸고, 현재만 존재하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관점에서 미래는 만들어지지 않은 영역이다. 내일 내가 어느 길로 갈지, 누구를 만날지, 세계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예언은 이상한 능력이 된다. 존재하지 않는 정보를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하지만 현대 물리학이 시간을 바라보는 방식은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보다 훨씬 낯설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지금’이 있을까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가져온 가장 기묘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동시성의 상대성이다.

멀리 떨어진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는지는 모든 관찰자에게 절대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관찰자는 사건의 시간적 순서와 ‘동시에 일어난 사건들의 집합’을 다르게 나눌 수 있다.

물론 원인과 결과가 뒤집힌다는 뜻은 아니다. 빛보다 빠르게 정보가 전달될 수 없는 인과관계는 유지된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우주 전체에 공통된 하나의 현재는 더 이상 간단한 개념이 아니다.

우주에 절대적인 ‘지금’이 없다면, 과거는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일까.

블록 우주

이 질문에서 등장하는 철학적 시간관 가운데 하나가 영원주의(Eternalism)이고, 이를 설명할 때 흔히 사용하는 그림이 블록 우주(Block Universe)다.

공간에 앞·뒤·위·아래가 있듯이 시간도 시공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차원으로 생각한다. 그 그림에서는 우주를 거대한 시공간 전체로 바라본다.

비유하자면 영화 필름과 비슷하다. 영화 속 주인공에게 다음 장면은 미래다. 하지만 영사기 옆에 놓인 필름 전체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첫 장면도, 중간 장면도, 마지막 장면도 필름 위에 존재한다.

물론 이것은 시간을 이해하기 위한 비유이지, 상대성이론이 우리가 사는 우주가 문자 그대로 영화 필름이라고 증명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 관점을 받아들이면 질문이 바뀐다. 미래는 만들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예언은 ‘보는 것’일까

여기서부터는 과학이 아니라 가설이다. 블록 우주가 예언이나 예지몽을 증명한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사고실험은 가능하다. 과거·현재·미래가 모두 시공간의 일부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예언자는 없는 미래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시간보다 뒤쪽에 있는 정보에 어떤 방식으로든 접근한 사람이라는 전혀 다른 정의가 가능해진다.

이것은 앞선 글에서 살펴본 앤서니 피크의 다이몬과 묘하게 만난다. 피크의 관점에서는 다이몬이 이미 인생을 경험했기 때문에 앞일을 안다. 그래서 예언은 미래를 ‘보는’ 일이 아니라 이미 겪은 것을 ‘기억해 내는’ 일이 된다.

물리학의 블록 우주와 피크의 다이몬은 전혀 다른 종류의 주장이다. 하나는 시간에 관한 물리학·철학적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에 관한 사변적 가설이다. 둘을 같은 이론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둘이 던지는 질문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우리가 미래라고 부르는 것이 정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예지몽이라는 이상한 현상

예언보다 더 개인적인 형태가 예지몽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어떤 장소나 상황을 꿈에서 본 뒤 실제로 비슷한 일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대부분은 우연, 선택적 기억, 꿈의 재구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꿈을 꾸지만 맞지 않은 꿈은 잊어버리고, 나중에 비슷한 사건이 발생한 꿈만 특별하게 기억하기 쉽다.

따라서 사건이 발생한 뒤에 기록된 꿈은 강한 증거가 되기 어렵다. Salgil에서 예지몽을 다룰 때 사건 이전의 기록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사건 이전에 날짜가 확인되는 구체적인 기록이 존재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그때부터는 ‘정말 미래를 보았는가?’에 앞서 ‘사건 전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었는가?’라는 검증 가능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예언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비함보다 시간표시(timestamp)인지도 모른다.

데자뷔: 기억이 시간을 잘못 붙였을 때

데자뷔는 조금 다르다. 처음 겪는 장면인데도 이미 경험한 것처럼 느껴진다. 신경과학에서는 기억 처리 과정의 오류 등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으로 연구한다.

그러나 인간이 왜 데자뷔를 ‘미래를 미리 본 기억’처럼 느끼는지는 흥미롭다. 앞선 글에서 피크는 데자뷔와 불길한 예감 등을 다이몬이 현재의 자아에게 보내는 신호로 해석했다.

과학적 설명과 피크의 설명은 같은 수준의 주장이 아니다. 하나는 검증을 시도할 수 있는 뇌 현상의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과 시간에 관한 철학적 가설이다.

그러나 데자뷔는 우리에게 한 가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의식에서 ‘지금’과 ‘기억’의 경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벽하지 않다는 것.

미래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만약 미래가 이미 존재한다면 우리의 선택도 이미 존재하는 것일까. 내일 내가 커피를 마실지 차를 마실지도 시공간 어딘가에 이미 놓여 있다면, 지금의 선택은 무엇인가.

블록 우주를 곧바로 단순한 숙명론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미래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 사건이 시공간에 존재한다고 해서, 그 선택이 외부의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정해졌다는 뜻까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상한 표현이 가능하다. 미래가 존재한다 해도 그 미래 속에서 선택하는 사람 역시 나다.

정해진 미래와 자유의지는 반드시 단순한 반대말일까. 이 문제는 물리학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철학의 오래된 문제가 다시 등장한다.

만약 미래를 알게 된다면

누군가 미래를 정확히 보았다고 하자. 그는 내일 자신이 사고를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처음 보았던 미래는 무엇이었을까.

미래를 알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예언은 자기 자신의 정확성을 파괴한다. 반대로 아무리 노력해도 예언된 사건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강한 결정론에 가까워진다.

고대의 수많은 예언 이야기가 바로 이 구조를 갖는다. 예언을 피하려고 한 행동이 오히려 예언을 실현시킨다.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진정한 예언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더라도 또 다른 질문이 남는다. 미래의 정보는 바꿀 수 있는 경고인가, 바꿀 수 없는 기억인가.

하나의 미래인가, 여러 미래인가

미래가 하나가 아니라면 어떨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가능한 결과가 갈라진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면 예언자는 확정된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미래 가운데 하나를 본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을 예언이나 초능력의 증거로 사용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여러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와 ‘인간이 다른 미래의 정보를 받을 수 있다’ 사이에는 엄청난 논리적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을 증거 없이 뛰어넘으면 과학이 아니라 이야기가 된다.

Salgil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 경계다.

예언을 세 종류로 다시 바라보기

첫 번째는 뇌의 예측이다. 인간의 뇌는 과거 경험과 현재의 단서를 이용해 끊임없이 다음 상황을 예측한다. 아주 뛰어난 직관이 때때로 예언처럼 느껴질 수 있다.

두 번째는 기억과 해석의 오류다. 모호한 말이 사건 뒤에 구체적인 예언으로 바뀌고, 맞은 것만 살아남는다. 우리가 Salgil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영역이다.

세 번째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가능성이다. 정말 사건 이전에 구체적인 미래 정보가 기록된 사례가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믿음으로 답할 필요가 없다. 자료를 남기면 된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예언을 연구하면서 가장 큰 문제는 늘 같은 곳에서 발생한다. 사건이 먼저 일어나고 예언이 나중에 유명해진다. 원문은 사라지고, 날짜는 흐려지고, 표현은 조금씩 바뀐다. 십 년 뒤에는 아무도 최초의 문장이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Salgil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단순하다. 미래를 설명하려 하지 말고 먼저 기록하는 것.

누가 말했다. 언제 말했다. 정확히 무엇이라고 말했다. 원본은 어디에 있다. 언제까지 판정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사건이 발생하면 원래 문장과 비교한다. 발생하지 않아도 기록을 지우지 않는다.

그렇게 수십 년의 자료가 쌓인다면 우리는 적어도 하나의 질문에는 지금보다 훨씬 정확하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정말 미래에 관한 정보를 사건 전에 기록해 왔는가.

맺으며: 시간의 어느 지점에서

여기서부터는 사색이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상하다.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그 현재는 이미 과거가 된다. 잡으려고 하면 사라지는 것이 현재라면, 우리가 평생 경험하고 있다는 ‘지금’은 대체 무엇일까.

어쩌면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예언자는 남들보다 먼 곳을 보는 사람일까. 아니면 기억과 가능성의 조각을 미래라고 착각한 사람일까. 혹은 앤서니 피크가 상상했듯,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은 이미 그 길을 지나온 것일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알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기록할 가치가 있다.

앞선 글은 마지막에 이렇게 물었다. 예언은 어디서 오는가.

이번에는 질문을 하나 바꾸어 남긴다. 예언자가 미래를 보았다고 말할 때, 그가 보았다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