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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GIL ESSAY / 03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고통까지 자기 삶으로 긍정한다는 뜻을 살펴봅니다.

  • 운명애
  • 필연
  • 고통
  • 삶의 긍정

들어가며: 사랑할 수 없는 것까지 사랑한다는 말

앞선 탐구에서 니체의 영원회귀를 하나의 질문으로 받아보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채 무수히 되돌아온다면, 그래도 이 삶을 원할 수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니체가 내놓은 가장 짧고 강한 대답이 ‘아모르 파티(amor fati)’다. 라틴어로 운명에 대한 사랑, 또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운명을 사랑한다는 말은 쉽게 오해된다. 일어난 모든 일이 좋았다고 믿으라는 것일까. 피할 수 없는 불행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일까. 고통을 견디는 사람이 더 위대하다는 뜻일까.

니체가 말한 운명애는 그런 수동적인 복종보다 훨씬 어려운 요구다. 이미 일어난 일을 삶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 언젠가 다른 세계가 지금의 삶을 보상해 줄 것이라는 기대, 필연을 원망하는 태도 전체를 넘어설 수 있는지 묻는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 앞에 멈춰 서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삶 전체를 자기 힘의 재료로 바꾸는 일이다.

니체가 처음 적은 운명애

니체가 ‘아모르 파티’라는 표현을 전면에 내세운 곳은 1882년에 출간된 『즐거운 학문』 276절 「새해를 위하여」다.

그는 사물에서 필연적인 것을 아름답게 보는 법을 더 배우고 싶다고 쓴다. 그렇게 필연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고 싶으며, 앞으로는 운명애가 자신의 사랑이 되기를 바란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말은 ‘배운다’는 표현이다. 운명애는 고통을 겪는 순간 자동으로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처음부터 모든 일을 반길 수 있다는 주장도 아니다. 필연적인 것과 맺는 관계를 오랜 시간 바꾸어 가는 훈련에 가깝다.

니체는 같은 절에서 고발하고 비난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언젠가는 오직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쓴다. 운명애는 현실을 향한 무조건적인 낙관보다, 삶 전체에 대한 긍정의 방향을 가리킨다.

견디는 것을 넘어 사랑하기

체념  ──  어쩔 수 없으니 견딘다
수용  ──  이미 일어난 사실을 인정한다
운명애 ──  그 사실까지 내 삶의 힘으로 만든다

니체는 말년에 쓴 『이 사람을 보라』에서 운명애를 자신의 ‘인간의 위대함을 위한 공식’이라고 부른다. 미래에도 과거에도 영원 전체에서도 아무것도 달라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 필연적인 것을 단지 견디거나 감추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다.

견딘다는 말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것을 자기 삶의 일부로 기꺼이 떠맡는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운명애는 바로 그 거리를 없애려 한다. ‘이 일만 없었더라면 나는 나일 수 있었을 텐데’라는 문장을 ‘이 일까지 포함한 전체가 지금의 나를 이루었다’는 문장으로 바꾼다.

그렇다고 상실을 기쁨이라고 부르거나 상처가 아프지 않았다고 거짓말할 필요는 없다. 사랑은 사실을 바꾸는 주문이 아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자기 삶의 바깥으로 추방하지 않는 태도다.

숙명론과는 무엇이 다른가

운명애를 ‘모든 것이 정해져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숙명론으로 읽으면 핵심을 놓치게 된다.

숙명론은 행동의 의미를 약화시킨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노력과 선택이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다. 그러나 운명애에서 나의 행동과 저항, 결단 역시 삶의 바깥에 있지 않다. 그것들도 내가 사랑해야 할 운명의 일부가 된다.

병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치료를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실패를 자신의 삶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다시 시도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관계가 나를 파괴하고 있다면 떠나는 결단도 그 사람의 삶을 구성한다.

운명애는 벌어진 사건을 선택했다고 우기는 태도가 아니라, 그 사건 이후의 태도를 남에게 넘기지 않는 일이다. 내가 통제하지 못했던 조건과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행동을 한 삶 안에서 함께 받아들인다.

신이 정한 계획을 믿는 것인가

‘운명’이라는 말은 흔히 초월적인 계획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일이 어떤 신비한 목적을 위해 일어났고, 나중에는 결국 최선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니체의 운명애에는 그런 보증이 없다. 『즐거운 학문』 277절에서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결국 최선이었다고 느끼게 만드는 ‘개인적 섭리’의 유혹을 경계한다.

운명애는 우주가 나를 위해 사건을 배치했다고 믿는 일이 아니다. 고통 뒤에 숨겨진 보상을 약속하지도 않는다. 아무런 보증이 없어도 이 세계와 이 삶을 긍정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니체의 긍정은 더 어렵다.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믿음에 기대지 않고, 이미 벌어진 일과 아직 알 수 없는 결과를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다시 의지할 수 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구원에 대하여」에서 가장 큰 문제로 등장하는 것은 과거다. 의지는 앞으로는 행동할 수 있지만 뒤로 돌아가 이미 벌어진 일을 바꿀 수 없다. 과거의 ‘그랬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돌처럼 남는다.

니체가 말하는 구원은 과거를 삭제하는 데 있지 않다. ‘그랬었다’를 ‘나는 그렇게 원했다’로 바꿀 수 있는 관계에 있다. 이 표현은 과거의 폭력이나 불행을 실제로 원했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 일어난 사실이 현재의 삶 전체와 분리될 수 없음을 긍정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우리는 사건을 다시 선택할 수 없지만 그 사건이 자기 삶에서 마지막으로 의미하는 것은 다시 만들 수 있다. 실패가 영원한 패배로 남을지, 이후의 방향을 바꾼 계기가 될지는 아직 닫히지 않았다.

운명애는 기억을 지우는 기술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원한이 현재의 모든 힘을 소모하지 못하게 하는 태도다.

고통을 미화하라는 뜻은 아니다

니체는 고통이 한 사람의 성장과 탁월함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생각을 ‘고통은 언제나 좋다’거나 ‘고통받는 사람은 그대로 견뎌야 한다’는 명령으로 바꾸면 위험하다.

모든 고통이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고통은 사람을 무너뜨리고, 어떤 폭력은 즉시 멈춰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그것도 그의 운명이라고 말하는 순간 운명애는 잔인한 방관의 구실이 된다.

운명애는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도덕 규칙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대하는 문제로 읽는 편이 타당하다. 피해자에게 가해를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말이 아니라, 이미 입은 상처가 자신의 남은 삶 전체를 빼앗도록 두지 않을 가능성을 묻는 말이다.

부당함에 저항하고 환경을 바꾸는 행동도 삶의 긍정에 포함된다. 사랑해야 하는 것은 억압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도 행동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이다.

주어진 것과 만들어가는 것

운명은 흔히 외부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창조는 내부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니체의 운명애에서는 둘이 그렇게 간단히 갈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태어난 시대와 장소, 몸, 우연한 만남, 이미 벌어진 사건을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조건을 해석하고 연결하고 하나의 삶으로 만드는 과정에는 자신의 힘이 들어간다.

운명애는 주어진 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일이 아니다. 주어진 것으로부터 이전에는 없던 자신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과거의 상처도, 우연한 행운도, 지금의 결단도 하나의 형식 안에 배치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삶의 단순한 관객이 아니다. 편집할 수 없는 장면까지 포함해 전체 작품을 책임지는 창작자에 가깝다.

오늘에 적용하는 운명애

여기서부터는 니체의 운명애를 오늘의 삶에 비추어 보는 사색이다.

첫째, 바꿀 수 있는 것과 이미 일어난 것을 구분한다. 바꿀 수 있는 현실까지 운명이라고 부르며 포기하지 않는다. 반대로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머릿속에서 끝없이 다시 재판하느라 현재의 힘을 모두 쓰지 않는다.

둘째,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 다음에 ‘이 일로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놓는다. 첫 질문은 원인을 찾게 하지만, 두 번째 질문은 다음 행동을 열어준다.

셋째, 성공한 장면만 자기 삶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실패와 우회, 기다림도 지금의 자신에게 이르는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을 좋아할 필요는 없지만 없었던 일로 만들려고 자신을 소모하지 않는다.

운명애는 매 순간 행복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삶의 어느 부분도 영원히 적으로 남겨두지 않으려는 방향이다.

영원회귀가 묻고 운명애가 답한다

영원회귀와 운명애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만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만난다.

영원회귀는 묻는다. 기쁨과 고통, 위대한 순간과 하찮은 순간까지 이 삶이 동일하게 되돌아와도 원하는가. 운명애는 그 질문 앞에서 다른 과거나 다른 세계를 요구하지 않고 이 삶 전체를 원할 수 있는 태도다.

한 번의 불행을 견디는 것과 그것이 영원히 돌아오는 삶 전체를 긍정하는 것은 다르다. 반복이라는 조건은 우리가 삶에서 몰래 지우고 싶었던 부분까지 다시 불러낸다.

그러므로 운명애는 영원회귀의 정답이라기보다 영원회귀를 견딜 수 있는 힘이다. 우주가 실제로 반복되는지와 무관하게, 같은 삶을 다시 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금을 살아보라는 요구다.

맺으며: 운명으로부터 삶을 만드는 일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일어난 모든 일을 좋은 일이라고 판정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을 미화하거나 부당한 현실에 복종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을 자기 삶의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는 태도다. 바꿀 수 없는 과거 때문에 지금의 가능성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에서 자신의 다음 행동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체념은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운명애는 ‘이것이 나의 삶이라면, 나는 이것으로 무엇을 만들 것인가’라고 묻는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는 운명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운명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고, 그 삶을 다시 원할 수 있을 만큼 강하게 창조하라는 요구다.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을 사랑할 수 있는가. 아직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원문과 더 읽을 자료

본문은 니체의 출간 저작과 철학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운명애의 뜻과 해석의 경계를 구분했다. 인용 대목은 특정 한국어 번역본을 옮기지 않고 원문의 뜻을 요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