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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GIL ESSAY / 09

우리가 보는 세계는 진짜인가

인도철학의 마야를 중심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와 궁극적 실재의 차이를 묻습니다.

  • 마야
  • 브라흐만
  • 아트만
  • 실재

들어가며: 눈앞의 세계를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보고 만지고 기억하는 세계를 현실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같은 사건도 관점과 욕망에 따라 전혀 다르게 경험된다. 꿈속에서는 꿈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깨어난 뒤에야 그 판단이 틀렸음을 안다.

인도철학의 마야(māyā)는 이 틈에서 시작한다. 흔히 ‘환상’으로 번역되지만, 세계가 아예 없다는 한마디로 끝나는 개념은 아니다. 특히 아드바이타 베단타에서 마야는 하나인 궁극적 실재가 다수의 독립된 사물처럼 나타나고, 우리가 그 나타남을 최종 실재로 오해하게 되는 조건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세계는 가짜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무엇을 ‘진짜’라고 부르는지 나누어야 한다.

마야는 단순한 마술이나 거짓말이 아니다

마야라는 말은 베다 문헌에서 힘이나 놀라운 능력을 가리키기도 했고, 시대와 전통에 따라 뜻이 달라졌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우주적 환영’이라는 설명은 주로 아드바이타 베단타의 체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마야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세계를 만들어내는 개인의 공상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인과와 규칙이 작동하는 공통 세계에서 살아간다. 다만 그 세계를 서로 완전히 분리된 사물들의 집합이며 그 자체로 궁극적인 실재라고 받아들이는 인식이 문제다.

따라서 ‘세계가 마야다’라는 말은 책상이나 타인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면허가 아니다. 경험 세계는 삶과 윤리가 이루어지는 현실이지만, 그것이 실재의 마지막 설명은 아니라는 주장에 가깝다.

브라흐만과 아트만

아드바이타에서 브라흐만(Brahman)은 다른 모든 것 뒤에 놓인 하나의 물체가 아니다. 존재와 의식의 궁극적 근거이며 둘째가 없는 실재로 설명된다. 아트만(ātman)은 몸과 성격, 사회적 지위가 바뀌어도 그것들을 경험하게 하는 참된 자기의 문제를 가리킨다.

샹카라의 불이론은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우리가 자신을 유한한 개별 자아로만 여기는 것은 무지(avidyā) 때문이며, 해방은 새로운 실체를 얻는 일이 아니라 이 비분리를 아는 일이다.

이때 ‘내가 곧 우주다’라는 자기과시로 읽으면 뜻이 뒤집힌다. 일상적 자아가 우주의 주인이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독립된 중심이라는 믿음 자체가 궁극적 관점에서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밧줄을 뱀으로 보는 순간

아드바이타 전통을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비유가 어두운 곳의 밧줄이다. 사람은 밧줄을 보고 뱀이라고 오인해 실제 공포를 느낀다. 뱀은 그 상황에서 경험되지만, 불을 밝히면 밧줄 위에 잘못 덧씌워진 판단이었음이 드러난다.

이 비유에서 지식은 밧줄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있었던 것을 바르게 보게 한다. 마찬가지로 브라흐만을 안다는 것은 세계를 파괴하는 일이 아니라 독립된 다수성에 대한 오인을 걷어내는 일로 설명된다.

그러나 비유를 문자 그대로 밀어붙이면 안 된다. 경험 세계 전체가 개인의 착각이라는 뜻이 아니라, 나타남과 그것의 궁극적 근거를 혼동하는 구조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다.

현실에는 층위가 있는가

아드바이타 해석에서는 흔히 꿈이나 착각의 현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경험적 현실, 브라흐만의 궁극적 현실을 구분한다. 꿈에서 본 호랑이는 깨어나면 사라지지만, 깨어 있는 세계의 호랑이는 여러 사람이 확인하고 실제 결과를 만든다.

경험적 현실은 꿈과 같다는 이유로 무시되지 않는다. 배고픔과 폭력, 돌봄과 약속은 그 층위에서 실제 결과를 낳는다. 궁극적 실재를 말한다고 해서 경험 세계의 책임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구분의 목적은 ‘아무것도 진짜가 아니다’라는 허무주의가 아니다. 어떤 판단이 어느 층위에서 성립하는지 묻고,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붙잡지 않게 하는 데 있다.

모든 인도철학이 세계를 환상이라 했는가

그렇지 않다. 베단타 내부에서도 라마누자의 비시슈타드바이타와 마드바의 드바이타는 샹카라의 급진적 불이론과 다르게 브라흐만, 개별 영혼, 세계의 관계를 설명한다.

특히 마드바의 이원론은 인간의 자아와 브라흐만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주장하고, 일상적 지각이 보여주는 복수성과 차이를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인도철학은 모두 세계를 가짜라고 본다’는 문장은 이 논쟁을 지워버린다.

마야는 인도 전체의 단일 교리가 아니라 특정 전통에서 실재와 경험의 관계를 설명해 온 중요한 개념이다. 다른 학파의 반론까지 함께 볼 때 질문의 깊이가 드러난다.

마야는 과학 이론인가

마야는 물리학이 발견한 우주의 성질이나 뇌과학의 실험 결과가 아니다. 세계가 시뮬레이션이라는 현대 가설을 고대 인도인이 미리 증명했다는 뜻도 아니다.

인지과학이 지각의 구성 과정을 연구하고 물리학이 관찰과 실재의 관계를 묻는다고 해도, 그것이 곧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동일성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질문의 닮음과 증명의 동일성은 구분해야 한다.

마야의 가치는 우리가 경험을 곧바로 최종 실재와 동일시해도 되는지, 보는 주체와 보이는 세계를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지 묻게 하는 철학적 힘에 있다.

세계가 아니라 확신을 의심하는 일

여기서부터는 마야를 오늘의 삶에 비추어 보는 사색이다.

우리는 사건보다 사건에 붙인 이름 속에서 더 오래 산다.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 내 편, 적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살아 있는 관계는 고정된 실체처럼 보인다.

마야를 성급히 ‘세상은 가짜’라고 읽기보다 ‘내가 붙잡은 설명이 전부인가’라고 읽어보면 어떨까. 그렇게 보면 깨어남은 세계에서 도망치는 일이 아니라 세계를 덜 왜곡해서 보는 훈련이 된다.

눈앞의 세계는 삶이 벌어지는 자리다. 다만 우리가 그것에 붙인 구분과 소유의 선이 실재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확신할 근거는 없다.

맺으며: 보이는 것은 거짓이 아니라 나타남이다

마야는 세계를 무가치한 허깨비로 지우는 말이 아니다. 아드바이타에서 그것은 하나의 실재가 다수로 나타나고, 인간이 그 나타남을 독립된 최종 실재로 오해하는 조건을 설명한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경험과 행위의 층위에서 실제다. 그러나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비분리를 말하는 궁극적 관점에서는 그 분리와 다수성이 마지막 진실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진짜인가. 아드바이타의 대답은 ‘없다’가 아니라 ‘보이는 방식이 전부는 아니다’에 가깝다.

원문과 더 읽을 자료

본문은 마야를 아드바이타의 문맥에서 설명하고, 이를 인도철학 전체의 단일 주장으로 확대하지 않았다.